활동가복지
[2023 활동가에게건강을!]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 법
제목: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 법
글쓴이: 활동가 오월님(가명)
저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입니다.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같은 단어를 만난 건 30대가 되어서였습니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하기 이전까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항상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부적합 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생계를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생활을 해야 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무리에 속해 타인과 어울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 무리는 남성의 무리와 여성의 무리로 나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남성과 여성으로 먼저 역할을 나누고 역할 놀이를 합니다. 그런 관례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저는 어릴 적부터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는 저의 정체성을 숨기고 가면을 쓸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성을 숨기는 일이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저는 저의 정체성을 뭐라고 부르는지도 몰랐고 뒤늦게 찾은 논바이너리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곤란한 순간이 찾아오면 숨어버리거나 사라져 버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몇 달 동안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고 스스로를 좁은 원룸에 가둔 채 시간을 보내길 반복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숨어버리고 사라져버리는 습관은 생계를 위협하는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계를 위한 일터에도 타인이 존재하고 무리가 존재합니다. 그곳의 타인(동료라고들 말하지만 저는 타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은 일단 제가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판단하고 저를 어떻게 대할지 결정합니다. 그들이 판단한 성별에 따라 하는 농담도, 성적 농담의 수위도 달라지며(성이 없으면 농담도 어려운가 봅니다), 스몰토크의 주제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가면을 쓰고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면 업무시간이나 업무강도가 아니라, 어느 쪽으로든 저를 판단하고 있는 타인과 농담을 나누거나 근황을 나누거나 하는 시간이 견딜 수 없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건물 앞에서 멈춰 버린 적이 있습니다. 회사의 문 앞에 서 있는데 회사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신과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저에게 상담치료를 권했습니다.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저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숨어버리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의 문을 두드림으로써 상담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치료를 통해 겪은 변화 덕분에 스스로를 알아가며 성별 정체성을 찾아나갈 수 있었고, 정체성을 인정한 후 성소수자 인권 활동도 할 수 있었습니다. 성소수자 인권 단체에서 만나는 동료들은 적어도 저를 어느 쪽으로 판단하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습관은 가끔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인권 운동의 영역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맡은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효능감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상담 치료의 병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담 치료의 가장 큰 단점은 비용입니다. 비보험 항목으로 전액 자부담이기에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치료입니다. 이에 비온뒤 무지개 재단의 <활동가에게 건강을!> 지원사업을 발견하게 되었고, 기쁘게도 선정되어 치료 비용의 부담을 일부 덜 수 있었고 상담 치료를 지속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