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21일을 기념하며 11월 21일의 숫자를 따서 112,100원을 비온뒤무지개재단에 하루 일찍 기부합니다. 이왕이면 백십이만천원이나 천백이십일만원으로 맞추면 더 좋으련만... 아직 그것은 무리인지라 단위는 좀 낮추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이 날을 이렇게 기념할 수 있어서 혼자 마음은 좀 붕 뜨는 듯 합니다.
1997년 11월 21일은 서울 중구 신당동의 2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을 계약한 날입니다. 당시에 저는 하이텔 PC통신 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 <또하나의사랑>의 대표시삽으로 활동하다가 우리나라에도 외국처럼 성적소수자의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다들 좋다고 하길래, 정말 그냥 덜컥 시작해버렸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짓을 멋모르고 벌인 거죠. 지금 하라면 절대 안할 일인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그대로 겁 없이 꿈만 가지고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산 컴퓨터 한 대와 현금 150만원을 들고 월간지 창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세상과 친구가 된다는 의미로 <BUDDY>라는 제호를 가진 그 잡지는 그로부터 딱 3개월 뒤인 1998년 2월 20일에 창간호를 발행합니다. 그러고보니 내년 2월 20일이 되면 버디 창간 17주년이 되네요. 제 핸드폰 뒷자리가 0220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
1997년 11월 21일로 시작되는 금전출납부는 임대료 300,000원과 청소도구 4,000원 지출로 시작됩니다. 무보증금이었고 책상 등의 사무집기가 제공되는 곳이었고, 밤엔 건물문이 잠기는지라 좀 늦게까지 일하면 꼼짝없이 밤샘을 해야하기도 했고, 언젠가 아침에 출근하니 문앞에 누군가 볼펜으로 욕설을 적어놓고 복도에 잠시 쌓아둔 잡지를 한권 훔쳐갔길래 그 소심함에 혀를 차기도 했던 신당동 사무실. 참, 사무실앞에 소주를 마시면 삼겹살 안주가 무한제공되는 술집이 있었더랬습니다. 그 술집에서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들과 사건들...을 잊을 수가 없지요.
그 시절에 마련한 사무집기중에 아직도 쓰고 있는 것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 켜켜히 쌓인 세월의 흔적은 저만 알아볼 수 있겠지만요. (손으로 쓴 서점 장부, 10원까지 기록한 금전출납부와 통장이며 취재수첩, 그리고 독자편지까지 모두 다 가지고 있지요.) 여튼, 그렇게 1997년에 시작된 사무실은 한번도 쉼없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1997년의 11월 21일을 기억하는 건 저로서는 처음의 그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는 것.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항상 바로 그 날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무실을 마련했던 첫 번째 이유였던 <BUDDY>는 2003년 12월로 종간을 했지만 그 사이에 <도서출판 해울>을 차려서 단행본도 발간했었고, <버디친구닷컴>이라는 커뮤니티 웹사이트도 운영하고,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로 문화활동을 중심으로 한 인권운동을 이어나가고, 오갈 데 없다며 은근슬쩍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사무실을 나누어 쓰자며 들어오고,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이 퀴어의 역사를 모으고, <별의별상담연구소>가 상담을 진행하던 공간으로도 쓰이고... 2평에서 시작한 사무실이란 공간의 역사를 새삼 따져보니 왠지 흐뭇해지네요.
1997년 11월에 버디를 함께 준비했던 분들에게도 기념과 추억을 한 조각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때 고생많았고,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것이었음을 이제야 알 거 같다고... 그저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11월 21일이든 2월 20일이든 이 날들이 그 분들에게도 인생의 작은 기념일로 남길!
겨우 11만원정도 기부하면서 말이 너무 길어지긴 했지만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고 싶습니다.
오늘 서울시인권헌장 공청회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악을 쓰면서 반대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지요. 하지만 그분들께 당신들은 이미 늦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집니다. 우리들은 훨씬 더 오래전부터 이 날을 준비해 왔었다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이길 거에요. 오늘 당신들의 폭언은 우릴 더 강하게 만들어주네요. 앞으로도 좀 더 잘 싸워봅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할 수 있는 세상, 동성애자 이성애자 이런 식으로 서로 차이는 있어도 친구가 되는 세상이 언젠가 올거라 믿었던 그 마음. 그 마음이 1997년 11월 21일에 사무실을 열었던 초심이었으니까요.
스토리기부: 한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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