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학술
[2017] ALL.Y project의 가랑비프로젝트 후기입니다.7월 1일 친구들끼리의 모임에서 시작된 앨라이 프로젝트.
[성소수자와 앨라이가 함께 만드는 무대예술]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방법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던 우리는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으니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지원사업에 신청해보자는 의견에 동의해 기획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활동의 목표로 성소수자를 친구로 둔 사람들이 성소수자의 인권문제를 어떻게 지지하고 공론화 할 것인가 하는 방식을 고민하였습니다. 논의 속에서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 성소수자와 퀴어의 연대
- 잘 할 수 있는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그러나 꾸준히
대부분이 문화예술영역에서 활동하거나 지속적 관심을 가져왔던 만큼, 시작은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사업명은 [가랑비 프로젝트]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우리 주위의 사람들부터 적셔나가자.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하다보면 뭐든 되어 있을 거야, 그런 마음이었지요.
8월 1일에 지원 선정 대상이라는 메일을 받고, 친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뒤 저는 혼자 조금 울었던 것 같습니다. 와, 진짜 두드리면 열리는 구나. 열심히 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8월 11일, 우리 프로젝트 이름처럼 [가랑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었지만 신나는 발걸음으로 재단의 부름을 받고 협약서에 싸인을 하러 갔었지요. 이후 프로젝트 실행을 위한 빠른 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일을 시작할 것인지를 고민하다 퀴어연극제와 접촉하여 앨라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하게 되었고, 우리가 만들 공연을 하반기에 연극제에 출품해 보기로 했습니다.
작, 연출, 배우, 스탭 전체를 성소수자와 앨라이로 구성하되, 단순히 ‘공연을 올린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과정 중에 마주하게 되는 갈등, 경계, 편견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가는 과정과 그 결과물로서의 공연을 목적으로 하자는 데에 뜻을 모으고 9월 마지막 주를 공연 일자로 확정했습니다. 사업 선정 이후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 일정에 우리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8월 중순에 공연에 참가할 배우와 스탭 모집에 이어 곧바로 팀을 확정하고, 동시에 인터뷰와 공연 준비 등으로 바쁜 날들을 보냈습니다. 공연에 필요한 것이 사람뿐만은 아니다보니, 제반사항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활동도 동시에 바삐 이루어졌습니다.
공연팀을 꾸리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젠더평등인식 및 성폭력예방과 관련한 프로그램 진행이었습니다.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성폭력의 사례를 중심으로 워크숍을 준비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성폭력 관련 교육 전문가와 함께 성소수자 및 예술계에 특화된 성폭력 예방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공연팀 전원을 대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앞으로도 프로젝트 실행 전 필수 단계로 이 교육 프로그램을 구성할 생각이 확고하게 생겼을 정도로, 각 구성원들의 생각면에서든 공연팀 전체적인 분위기면에서든 이 교육이 거둔 성과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든 ‘옥탑방크로키’라는 작품은 초연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대학로에서 여러 차례 무대에 올린 적이 있는 공인된 작품이었고, 30대 L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많이 담고 있는 극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퀴어와 앨라이가 함께 만들어 낸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치열한 연습이 시작됐습니다. 학생,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거주하는 지역이 다 다르다보니 연습 스케줄을 맞추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마음을 모아준 덕분에 평일 밤부터 새벽까지, 주말은 말할 것도 없이 먼 거리를 오가며 공연 연습에 열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9월 4일은 홍보물 프로필 촬영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공연팀의 프로필을 찍어주신 분은 다름 아닌 저희가 기금협약을 맺으러 갔던 날 처음 인사 나누었던 ‘코드지’의 멤버 유호상 님이었습니다. 공연 콘셉트를 비롯해 아무래도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웃팅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고민하던 차,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옷깃을 스친 인연을 무기로 공연 프로필 촬영을 의뢰드렸고, 취지를 들으신 작가님이 또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즐거운 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같은 사진을 찍어주신 덕분에 홍보와 제작물 등에서 많은 호평을 받아 무척 기뻤습니다.
9월 22일, 대망의 막이 올랐습니다. 앨라이가 결합된 형태의 공연에 연극제 측에서도 홍보로 많은 응원을 보태주었습니다. 또한 이반시티 퀴어문화기금으로 공연 제작에 필요한 일부 지출들을 감당해가며 ‘옥탑방크로키’를 무사히 무대에 올릴 수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10월, 11월, 12월까지 한달에 한 차례 이상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각자가 꿈꾸고 준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계속해서 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잠시 무대를 떠나 있었다가 이 공연에 참가하게 되면서 멈추었던 창작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퀴어문화 관련한 예술 분야에서 일을 계속하게 된 사람도, 곧 이어 다른 퀴어예술가와의 작업을 이어가는 앨라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내년에도 다른 작업 계획이 있느냐, 자신도 함께 할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12월 25일, 송년회 자리에서 다시 모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계속해서 이 프로젝트를 이어갈 생각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지난 활동이 개인의 일상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작업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인식 변화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2017년의 가랑비 프로젝트를 마무리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비온뒤무지개재단과 이반시티 관계자분께 정말 많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처음 진행하면서 이리 쿵, 저리 쿵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속에서 모두가 서로를 가족처럼 챙기며 한마음이 되어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큰 기쁨이었습니다. 어렵게 만나 마음을 주고 받으며 한해를 보냈는데, 한번으로 끝나는 프로젝트는 너무 아쉬워서 올해도 퀴어와 앨라이의 여행이야기를 콘텐츠로 다시 한번 앨라이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앨라이가 되는 일상의 기적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많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