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논리’의 세상에 새긴 ‘무지개빛’ 위로···‘길벗체’는 이렇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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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한 빨간색 선이 아래로 꺾이며 주황색으로 바뀐다. ‘ㄱ’이 만들어졌다. 노란 작대기가 옆에 붙고, 초록·파랑·보라색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ㄹ’이 그 아래를 받친다. 빨주노초파보 ‘길’이 생겼다. 그 옆을 무지개색 ‘벗’이 함께한다.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표현한 글꼴 ‘길벗체’로 ‘길벗’을 쓰면 펼쳐지는 광경이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이하 비온뒤)과 길벗체 개발팀 7명, 후원자 474명이 함께 만든 한글 폰트 길벗체가 지난 20일 공식 출시됐다. 한글 폰트로는 최초로 전면 색상을 적용했다. 색깔은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색을 썼다. 출시 3일째인 지난 23일 오후,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길벗체 책임개발자 ‘숲(31·배성우)’과 ‘제람(35·강영훈)’을 만났다.
23일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길벗체’ 개발자 제람(왼쪽)과 숲을 만났다. 이준헌 기자
■‘흑백논리’의 세상에 형형색색 무지개…힘든 길도 벗이 있어 견뎠다
“한 신문에 실린 길벗체 기사를 봤는데, 사진이 흑백이더라구요. 성소수자에 대해 ‘Yes or No’의 흑백논리를 펼치는 세상에 길벗체라는 ‘색깔 글꼴’을 내놓았다는 실감이 났죠.” 강씨의 길벗체 출시 소감이다. 배씨는 “울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함께 고생해 온 팀원들과 재단 관계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현직 서체 디자이너인 배씨는 “현직자로서 한글 폰트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지 안다. 길벗체는 그의 2~3배가 들었다”며 “사람들이 ‘너무 예쁘다’며 SNS에 올리는 모습을 보며 감동했다”고 말했다.
길벗체는 지난 1월,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 쓰기 위해 100자짜리 서체로 처음 탄생했다.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처음 만든 길버트 베이커(2017년 타계)를 기리는 영문 서체 ‘길버트체’를 두 사람이 한글판으로 개발했다. 글꼴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지난 5월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갔다. 배씨는 서체의 형태를 만들고 이를 컴퓨터 파일로 구현하는 실무를 담당했다. 시각예술가인 강씨는 색채 디자인과 외부·재단과의 소통을 맡았다. 팀원 5명이 더 모여 두 사람을 도왔다.
‘길벗체’ 개발자 제람(왼쪽)과 숲이 길벗체로 적힌 자신들의 별명과 개발팀 5명의 이름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서체를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일곱 명 모두 생업이 있었다. 주말은 거의 반납했고, 평일에도 퇴근 후 3~4시간은 쏟아부었다. 서체를 상용화하려면 약 2900자를 더 만들어야 했다. 알파벳과 달리 ‘모아쓰기’가 있는 한글은 폰트 제작이 더 까다롭다. 초성·중성·종성을 다 만든 뒤 모아 붙이는 방식으로, 상용한글 3000여 자를 하나씩 보며 다듬었다. 선례가 없는 ‘전면 색상’ 작업이라 더 고됐다. 같은 자·모음도 글자마다 색을 달리 하고, 획이 겹치는 부분은 어떤지도 하나하나 체크했다.
힘들었지만 ‘팀웍’으로 극복했다. 배씨와 강씨는 지난 2009년 진보 성향 기독교 단체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한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성소수자인 강씨와 ‘앨라이(성소수자와 연대하는 사람)’ 배씨는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돈독해졌다. 강씨는 “오랜 친구라 이심전심이다. 공동으로 결정할 필요가 없는 작은 일들은 내가 먼저 결정하고 배씨에게 말했는데, 내 결정이 대부분 배씨 뜻과 맞았다”며 “다른 팀원들이나 재단 관계자도 늘 서로 배려하며 ‘팀’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쏟아진 후원과 응원…“새로운 방식의 연대 느꼈죠”
오랜 작업 끝에 지난 20일 길벗체가 공식 출시됐다. 호응은 뜨거웠다. 서체를 내려받을 수 있는 비온뒤 홈페이지가 트래픽 과부화로 수 차례 다운됐다. SNS에 ‘인증샷’이 이어졌다. 배씨는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못 내던 사람들이 ‘쓰면서 힘이 난다’고 반응해준 게 의미 있었다”고 말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 등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참여한 일부 정치인들도 SNS에 길벗체 인증샷을 남겼다.
SNS에 쏟아진 길벗체 인증샷. 비온뒤무지개재단 제공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비온뒤의 뒷받침이 든든했다. 비온뒤는 프로젝트를 함께하자는 강씨의 제안에 ‘인건비 걱정하지 말고 일에 집중해라. 돈 문제는 우리가 하겠다’며 기꺼이 후원 모금을 맡았다. 강씨는 “비온뒤는 우리가 스스로를 갈아넣으려 할 때 오히려 막았다. 누군가의 희생에 기대지 말고 함께 했으면 좋겠다며.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후원자 474명의 응원이 가장 큰 힘이었다. 1500만원을 목표로 시작한 모금에 2694만원이 모였다. 개발자들은 후원자들의 이름으로 서체를 테스트했고, 후원자들은 피드백을 아끼지 않았다. 강씨는 “대기업이나 유명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들이 함께 만든 서체다. 새로운 방식의 연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후원자들의 이름은 비온뒤 홈페이지에 ‘공동개발자’로 올라 있다.
■“우중충한 글 쓰면 안 어울려!”…차별 겪는 모두를 위한 ‘명랑한 응원’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명랑하게 표현하는 데 길벗체가 쓰였으면 좋겠어요(배씨).” 이들이 많은 작업 중에서도 ‘서체’를 선택한 이유다. 자기표현에 목말랐던 경험 때문이었을까. 숲과 나무를 공부하던 배씨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서체 디자이너가 됐다. ‘소통’에 기반을 둔 매체라 서체가 좋았고, 끈기를 요하는 작업도 성격에 잘 맞았다. ‘제주 사람(제람)’ 강씨는 성소수자로 살며 느끼는 점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예술가다. 경영학도였지만, 강씨가 성소수자임을 알게 된 가족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라’며 응원해줘서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됐다.
23일 서울 중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길벗체’ 개발자 제람(왼쪽)과 숲이 웃고 있다. 이준헌 기자
‘더 다양한 사람’을 품기 위해 길벗체는 계속 진화한다. 이들은 트랜스젠더와 양성애자의 상징색으로 길벗체를 2개 더 만들고 있다. 강씨는 “최근 몇몇 사건에서 보듯 트랜스젠더는 가장 핍박받는 성소수자고, 양성애자도 ‘언제든 소수자성을 탈피할 수 있다’는 이유로 성소수자 그릇 안에서조차 소외된다. 두 그룹을 위한 길벗체를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사람들이 길벗체를 한 번 더 봐 주면 우리는 성소수자를 한 번 더 호명할 수 있다. ‘입을 다물어야 하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아닌 ‘우리’가 여기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에게 길벗체는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향한 응원이다. 공공장소에 걸린 성소수자 인권 캠페인 광고가 계속 훼손되는 우울한 현실에도, 명랑한 삶을 지켜나가자는 의미다. 길벗체의 ‘색깔’이 여기서 힘을 발휘한다. “길벗체로 우중충한 글 쓰면 진짜 안 어울려요(웃음). 밝은 글을 쓸 수밖에 없죠. 명랑한 메시지를 담는 서체로 사용됐으면 해요. 이 예쁜 서체로 담으면 좋을 이야기들이, 더 확대됐으면 좋겠습니다.” 강씨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