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다양한 삶과 존재를 지지하는 서체, 길벗체. 제람(길벗체 개발 공동 책임자) 저는 2020년 초에 서체 디자이너 숲,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라파엘 라시드와 함께 “차별과 혐오를 넘어 자부심으로!(Pride Over Prejudice)”라는 전시를 열었습니다. 저희는 이 전시를 위해 2018년부터 2019년까지 2년간 한국에서 성소수자가 종교적인 이유로 혐오와 차별을 경험한 사례를 보도한 기사를 모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주제를 접하기 어렵거나 낯설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저희가 모은 기사를 퀴어문화축제, 차별금지법 등 주제별로 분류하고 관객들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저희는 이 전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전시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서체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예술가이자 인권운동가인 길버트 베이커가 1978년에 성소수자를 비롯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삶과 존재를 지지하는 의미를 담아 빨, 주, 노, 초, 파, 보 여섯 빛깔 무지개 깃발을 만들었는데, 저희는 그 무지개 색상을 활용해서 컬러 폰트를 만들었습니다. 길버트 베이커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로 ‘길버트’와 발음이 비슷하면서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향하는 여정을 함께 간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길벗체’로 정했습니다. 저희는 이 전시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차별과 혐오로 위협받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전시장을 찾...
역사성
자긍심, 한글에 색을 입히다. 제람, 숲(길벗체 개발 공동 책임자) 길벗체는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서체입니다. 그 매력으로 다양성, 확장성, 역사성, 개방성 그리고 실험성을 들 수 있는데요. 길벗체가 역사적으로 지닐 의미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길벗체는 ‘한글 최초의 완성형 전면 색상 서체’입니다. 1. ‘서체’ 우리가 일상에서 ‘폰트’(font)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최근에는 폰트가 디지털 환경에서 쓰는 글자를 일컫는 말로 주로 쓰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서체’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우선 저희가 길벗체를 디지털과 아날로그 환경에서 고루 쓰이길 바라며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화면에서도, 인쇄된 책에서도 길벗체가 그 다채로운 빛을 발하길 바랍니다. 또 서체가 시대적인 가치나 그 시대를 연상시키는 시각적인 인상을 갖는 활자체나 글씨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대정신 중 하나가 다양한 삶과 존재를 지지하며 함께 자긍심을 갖는 것임을 길벗체를 통해 나타내고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2. ‘완성형’ 한글로 만든 서체를 일상에서 무리 없이 사용하려면 사용 빈도가 높은 글자 순으로 최소 3,000자 정도가 있어야 합니다. 대·소문자와 문장 기호, 숫자 등을 포함해 100자 정...
확장성
자발적 연대로 탄생하여 그 의미와 쓰임이 다양하게 확장되는 서체
다양한 삶과 존재를 지지하는 서체, 길벗체. 제람(길벗체 개발 공동 책임자) 길벗체는 성소수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지하기 위해 길버트 베이커(Gilbert Baker)가 고안한 무지개 깃발의 의미를 계승하고 그 여섯 색상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한글 서체입니다. 길벗체와 마찬가지로 길버트 베이커의 무지개 깃발에서 영감을 받아 먼저 출시된 영문 서체 길버트(Gilbert)가 있는데요, 이 두 서체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길벗체의 특징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영문 서체 길버트는 길버트 베이커의 죽음을 기리며 ‘뉴욕 프라이드’(뉴욕 퀴어문화축제, New York Pride)와 서체 제작사 ‘폰트셀프’(Fontself), 성소수자 미디어 단체 ‘뉴페스트’(NewFest) 그리고 광고 회사 ‘오길비 앤드 매더’(Ogilby & Mather)가 의기투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영문 알파벳의 특성상 100자 내외의 글자만으로도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작업량이 상대적으로 가벼운데다 서체 제작에 유리한 인적, 물적, 기술적 자원을 가진 전문 집단이 함께 진행했습니다. 이에 반해 한글 길벗체는 숲과 제람을 비롯한 7명의 디자이너가 자발적으로 모여 개발을 맡았습니다. 한글의 특성상 최소 3,000자를 만드는 것도 이미 큰일인데, 이렇게 어렵게 만든 한글 서체에 다시 전면 컬러를 입혀서 완성형으로 개발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
개방성
무수한 연대의 가능성을 가진 서체 제람(길벗체 개발 공동 책임자)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의 삶과 존재를 지지한다는 의미를 담은 영문 길버트체가 있습니다. 그 뜻에 동의하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길버트체의 탄생을 반겼고 서체에 담긴 의미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한글로 제작된 ‘길벗체’ 역시도 길버트체의 뜻을 잇고 있으며 여기에 확장 가능성까지 보다 넓혔습니다. 길벗체의 개발 경험은 길버트체가 또 다른 언어에 적용되는 과정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벗체는 영문 길버트체에 비해 글자수가 30배 가까이 많고 개별 글자의 구조도 훨씬 복잡합니다. 또한 3,000자에 달하는 상용 한글에 최대 11개의 색상 조합을 적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색상 구성 방식을 정할 때 개발자들이 많은 실험과 토론을 거쳤습니다. 여기에 길벗체는 길버트체와 달리, 트랜스젠더 자긍심의 색과 양성애자 자긍심의 색으로 구성된 가족 서체가 있기 때문에 최대 9,000개의 서로 다른 색상으로 글자가 만들어진 셈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작업 경험은 영어와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길버트-길벗체의 뜻을 잇는 서체를 개발하는 이가 참고하고 시행착오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 가지 색상 조합의 길벗체로 쓴 ‘제람’ 이미지 또한 길벗체는 대단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갖춘 대기업 혹은 유명 디자인 에이전시가 나서지 않더라도...
실험성
아름답게 쓰이도록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는 서체 제람(길벗체 개발 공동 책임자) 길벗체의 가장 큰 매력은 아름다운 색상 조합입니다. 영문 길버트체는 한글 길벗체를 제작하는데 좋은 길잡이 역할을 했지만, 길벗체를 만들 때 길버트체의 제작 방식을 온전히 적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우선 영문 알파벳보다 완성형 한글은 훨씬 복잡하고 획이 많은데, 그와중에 여섯 가지 무지갯빛 색상을 충실히 적용하면서 색상끼리 겹치는 부분과 가독성까지 고려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영문 길버트체와는 달리, 한글 길벗체는 무지갯빛 색상뿐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바이섹슈얼을 상징하는 색상 조합으로도 출시될 예정입니다. 따라서 더 많은 색상 조합 실험이 필요했습니다. 각각의 길벗체가 독립적으로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조화로움을 갖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길벗체의 색상 조합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삶과 존재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이 아름다운 서체 길벗체는 무상으로 배포됩니다. 길벗체의 아름다움에 값을 매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길벗체는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지만, 제작 의도에 맞춰 아름답게 사용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실험적인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특정 대상을 혐오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몇몇 표현은 길벗체로 썼을 때 구현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