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갯빛 한글, 당당함을 외치다
-길벗체, ‘글자’로 ‘혐오’ 넘어서기
전문 링크: http://www.snujn.com/news/48275
지난 7월 31일 신촌역,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라는 대형 광고가 게재됐다. 수백 명의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이 보낸 사진으로 만들어진 이 광고는 5월 17일인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해마다 열려오던 대규모 기념행사를 개최하기 어렵게 되자 이를 대체하는 취지에서였다. 지난 5월 게재를 목표로 기획된 이 광고는 서울교통공사가 구체적인 사유를 제시하지 않고 불승인 처분을 내리면서 2달 넘게 게재되지 못했다. 광고를 기획한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고 나서야 서울교통공사는 광고 게재를 승인했고 7월 31일 비로소 광고가 걸릴 수 있었다. 어렵사리 광고가 걸린 지 불과 이틀 뒤인 8월 2일, 그저 ‘성소수자가 싫었다’는 한 시민은 광고를 칼로 찢어 훼손했다.
▲지난 8월 2일 훼손된 신촌역 성소수자 차별 반대 광고 ⓒ연합뉴스
이렇듯 성소수자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는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일상속 혐오와 차별에 맞서 성소수자들이 보다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길벗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비온뒤무지개재단’과 서체 디자이너 7명이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무지갯빛 글자 ‘길벗체’는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됐을까.
길벗체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길벗체 프로젝트 공식 배너 ⓒ비온뒤무지개재단
길벗체는 무지개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한글 최초의 완성형 컬러 서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길버트 베이커(Gilbert Baker)는 성소수자의 상징인 여섯 색깔 무지개 깃발을 처음 고안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길벗체는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문 서체 ‘길버트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탄생했다. 그래서 길벗체라는 이름엔 길버트 베이커의 뜻을 기리고 길버트체에 연대한다는 의미와 함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향한 여정(길)의 벗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길버트체와 마찬가지로 무지갯빛으로 제작된 길벗체는 다양성과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드러낸다. 지난 5월 ‘비온뒤무지개재단’은 ‘완성형’ 길벗체 제작을 위한 모금운동인 ‘길벗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미 목표금액을 초과달성해 올 9월 첫 배포를 앞두고 있다.
▲길벗체의 모태가 된 영문 길버트체 ⓒType With Pride
혐오와 차별을 넘어서기 위한 문화적기획인 길벗체의 탄생은 올해 1월 서울에서 열린 ‘Pride over Prejudice(PoP)’ 전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자이너 숲과 제람은 2018년 미디어 속 성소수자 혐오표현을 시각적으로 아카이빙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이는 ‘이창국퀴어연구지원기금’에서 ‘올해의 연구’로 선정됐다. 이들은 프로젝트를 통해 수집한 성소수자 혐오표현을 시각적으로 참신하게보여주기 위해 길벗체를 제작해 전시회에서 공개하기로 했다.
숲 디자이너는 “글자는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사람의 목소리, 나아가 이념까지 담길 수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며 “길벗체를 통해 성소수자들의 당당함을 명랑하게 담아내고 싶었다”고 전시에 길벗체를 활용한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먼저 전시에 사용할 글자들을 길벗체로 제작하고, 전시가 끝난 이후엔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완성형’ 길벗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전시에서 길벗체는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디자이너 숲과 제람은 완성형 길벗체의 제작을 서두르기로 했다.
▲길벗체 프로젝트 공동개발책임자 디자이너 숲
서체 제작이 쉽지만은 않았다. 대소문자를 포함해 100여 자의 글자만 있으면 실생활 사용이 가능한 영문 서체와 달리,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이 조합돼야 비로소 하나의 글자가 완성되기에 완성형 서체 제작을 위해선 최소 3,000자, 많게는 만여 자를 일일이 만들어야 했다. 더군다나 길벗체는 기본 글자에 무지개 색깔까지 입혀야 하고 대부분의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기에 작업량이 일반 서체 디자인의 2~3배에 달했다. 짧게는 6개월, 길면 2년까지 걸리는 일이었다. 숲 디자이너는 “처음엔 작업을 어떻게 할지, 개발비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다”며 당시의 어려움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최초로 성소수자를 위해 설립된 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길벗체 제작자들이 제작과 제작비 모금을 동시에 해야하는 이중고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된 비온뒤무지개재단 측은 제작자들이 제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금 역할을 자처했다. 그렇게 ‘길벗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비온뒤무지개재단 한채윤 상임이사는 “길벗체 프로젝트의 성공이야말로 ‘편견 없는 기부문화 형성과 성소수자 인권 증진’이라는 재단의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추진 계기를 밝혔다.
제작 지원비 모금은 일정 금액을 후원한 사람에게 길벗체로 쓰인 이름 디자인을 정식 배포 전에 미리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적극적인 홍보에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이 줄을 이었고, 모금액은 목표치인 1,500만 원을 빠르게 넘어섰다. 모금액을 기반으로 5명의 디자이너를 추가 영입할 수 있었고, 공동개발 책임자인 디자이너 숲과 제람의 주도하에 서체 제작은 탄력을 받았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서체 디자이너 대부분이 생업에 종사해, 퇴근 후 여가와 주말을 반납하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작업은 3,000여 자의 검정색 기본 서체를 만든 후 6개의 기본 색상을 랜덤으로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한글은 영문과 달리 획과 획이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작업이 한층 복잡했다. 겹치는 부분은 비슷한 계열의 다른 색깔로 채워 넣어야 하므로, 글자 하나에만 10개에서 12개의 색이 사용됐다.
▲숲 디자이너의 길벗체 작업 화면 ⓒ디자이너 숲
글자를 완성한다고 작업이 끝나진 않는다. 숲 디자이너는 “서체는 무엇보다 각각의 글자들이 모여 한 문장으로 쓰였을 때 아름다워야 한다”며 “각각의 글자를 완성한 후 많이 쓰이는 단어, 문장들을 추려 글자들이 조화롭게 보일 수 있도록 수정하는 작업을 다시 거친다”고 설명했다. 숲 디자이너는 “서체 작업은 시간과 돈이 많이 들고, 고된 작업”이라면서도 “전시회 때도 길벗체에 대한 반응이 좋았고, 후원자 분들께서 길벗체를 많이 알려주고 계셔서 보람을 느낀다”며 길벗체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길벗체가 만들어나갈 새로운 풍경
개발 막바지 단계에 있는 길벗체는 9월 후원인들에게 먼저 제공된 후, 내년 1월 무료로 전면 배포될 예정이다. 글자는 대부분 완성됐지만 배포까진 한 단계가 더 남아있다. 길벗체로 혐오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다. 개발진은 길벗체로 성소수자 혐오표현을 입력하면 무지갯빛 글자가 회색으로 변하도록 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 숲 디자이너는 성소수자 혐오표현을 따로 분류하고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이런 기술적인 작업을 거치면 길벗체는 비로소 ‘한글 최초의 완성형 컬러 서체’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된다. 전면 배포에 앞서제작 발표회와 기념 책자 발간도 계획돼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서체를 제작할 땐 ‘패밀리’라고 불리는 가족 서체들이 함께 제작되는데, 길벗체의 경우 무지갯빛 외에도 다양한 색상 조합으로 만들어진 가족 서체에 여러 성소수자들의 정체성과 지향을 담아낼 예정이다. 성소수자 전체를 상징하는 무지갯빛 기본 서체에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연한 파란색-분홍색-흰색, 바이섹슈얼을 상징하는 진한 분홍색-보라색-파란색같은 색상 조합이 추가되는 방식이다. 목표금액을 초과한 후원금은 이처럼 서체를 다양하게 확장하는 데 사용된다.
길벗체가 앞으로 어떻게 사용되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숲 디자이너는 “지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고있는 성소수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모든 용기 있는 순간들에 길벗체가 사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런 숲 디자이너의 바람은 이미 실현되고 있다. 본인의 이름을 길벗체로 미리 받아본 후원자들이 그 이미지를 SNS에서 적극적으로 공유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후원단체들이 길벗체를 단체 로고에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숲 디자이너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대우나 성소수자들의 생활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면서 “성소수자들이 명랑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길벗체가 이바지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길벗체로 제작된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버튼 ⓒ비온뒤무지개재단
한채윤 상임이사는 “길벗체가 차별금지법 제정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편견과 차별을 멈추는 데, 모두를 위한 평등과 자유가 실현되는 데 작은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한다”며 길벗체의 사회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한채윤 상임이사가 말한 길벗체의 사회적 역할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신촌역 광고 훼손 사건의 대응에서 두드러졌다. 화려한 색감의 길벗체로 다시 만들어진 광고는 SNS상에 널리 퍼져 전보다 큰 파급력을 갖게 됐다. 한 상임이사는 “길벗체가 눈에 띌 때마다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과 존엄성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며 “길벗체가 우리 사회에 이런 자극을 끊임없이 주는 기능을 하길 바란다”는 기대를 밝혔다.
▲길벗체로 다시 태어난 신촌역 광고 ⓒ비온뒤무지개재단
차별과 혐오를 넘어서기 위한 명랑한 기획 길벗체는 이제 곧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다. 과연 길벗체는 혐오와 차별로 얼룩진 세상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일 수 있을까. 길벗체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장민제 기자(wkdalswp@snu.ac.kr)